勢道政治의 말로는 ‘민생토탄’ … ‘세도가’의 국정농단은 조선 쇠락의 ‘도화선’

[칼럼] 박 정 길 국장 (경가취재본부)

박정길 국장 | 기사입력 2021/02/15 [15:53]

勢道政治의 말로는 ‘민생토탄’ … ‘세도가’의 국정농단은 조선 쇠락의 ‘도화선’

[칼럼] 박 정 길 국장 (경가취재본부)

박정길 국장 | 입력 : 2021/02/15 [15:53]

▲ 박정길 국장

조선 500년史 중 19세기 초 - 중엽에 왕권을 탐욕 국정농단으로 국가 쇠락 · 백성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 붙인일족의 세도가(勢道家)들 작패가 세도정치 이다.

 
勢道(세도)의 본래 표기인 '世道(세도)'의 뜻은 세상 사람이 지킬 의미 이다. 국왕의 世道의 책임을 외척 가문의 장악으로 의미가 '勢道'로 바뀐 이유이다.

 
세도정치의 전조(前兆)는 정조의 왕위계승에 공이 큰 홍국영이 그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원빈으로맞게해 도승지로 한때 정권을 독차지 했다. 이것을세도정치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다.

 
본격적인세도정치는 순조(純祖, 1800-1834), 헌종(憲宗, 1834-1849), 철종(哲宗, 1849-1863) 에 이르는 60여년 이다. 이 시기에는 왕이 연속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국왕으로서 역할은 미숙하므로 섭정으로 세도가문(勢道家門)이 정치를 주도 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죽자, 정조의 유명을 받은김조순(金祖淳)은순조를 보좌하며그의 딸을 왕비를 삼고 정권을 장악한 후 그 일족 안동 김씨는 정부의 요직을독점 했다. 순조의 생모 집안인박준원 의반남 박씨 가문과세자빈의 친정 조만영의 풍양 조씨 가문 이 협조하면서 '안동김씨'의 전권시대는 순조의 30여년 재위 기간 동안 지속됐다.

 
순조는 신병으로 1827년 왕세자(효명)에게 대리청정 명으로효명세자는 정치를 수행하게 되는데 이때 세자의 처족인 풍양 조씨의 조만영(趙萬永)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효명세자는 치세 4년만인 22세에 죽는다.

 
1834년헌종이 즉위한 후 조만영의 아우조인영(趙寅永)이 영의정이 되어 헌종 15년간 정권을 장악해 이를 '풍양 조씨 세도 정치'라 한다. 헌종 즉위와 함께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의비 김조순의딸) 수렴청정으로 김조순 가문의 권력이 강대해 졌다. 그러나 헌종이친정하면부터 헌종의 어머니 집안인 풍양 조씨 가문과 격렬하게 대립하게 됐다. 정권을 잡기위한 안동 김씨 와 풍양 조씨 일문의 권력투쟁에 휘말리다가 적절한 민생 안정책도 세우지 못한 채 헌종은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1849년 강화도 섬 촌락의 19세 소년을 헌종의 후계자 철종으로 지명한 순원왕후가 재차 섭정하게 되면서  김조순 가문과조민영 가문의 대립이 재차 격화됐으나순원왕후의 친척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삼아, 정권은 다시김문근을 중심으로하는안동 김씨에게 돌아갔다. 이 후 김흥근, 김좌근,김병국등이 계속 영의정을 차지해 안동 김씨 60년 권력은 대원군 정권 직전까지 누렸다.

 
세도정치 60여년간 세도가들의 행위는 국가나 왕실의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각문벌 · 각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한 정치 였다. 권력을 잡은 세도가는 모든 고관 현직을 자기 문벌끼리 독점하고, 잔여 관직은 매관매직으로 경제적 부의 방편이 됐다.

 
매관매직으로 인한 사회 변화는, 경제력이 빈약한 정상적 양반들은 관직을 얻기가 힘들어 졌고대신 경제력을 지닌 상민들이 족보를 사 성씨를 구해 관계에 진출해 양반 독점 조선 전기의 '신분제도가 붕괴' 됐다.

 
돈을 투자해 관직에 오른자는 그 관직을 이용해 매직한 금전을 회수하고 이익을 보충하기 위해 노략질과 탐학을 공공연하게 자행하여 '삼정의 문란'으로 이어 졌다.

 
삼정이란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아 총43종류 였고 본래 그것은 지주(地主)층이 물게 됐는데 농토를 빌린 농민이 물게했다.'군정'은 16-60세의 장정에게 면포 2필을 부과하던 것을, 영조 때 균역법 실시로 1필의 군포를 징수했는데 이것이 문란해져어린이에게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添丁), 죽은자에게징수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유리민 몫까지 대신 납부하는 족징(族徵) 등 악랄한 수탈을 서슴치 않았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는 곡식인데 여기에 고액 이자를 물리고 환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 추수에 거둬들이는 수법으로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이르게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백성의 반항의식은 싹트기 시작했다.

 
 세도정치 60여년 거치는 동안 세도가들은 왕을 허위(虛位)로 내세워 국가기강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민생은 토탄에 빠졌다. 또한 국고는 고갈되어 경제가 혼란되자 민심은 저항 세력으로 결국 민란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1862년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민란은 진주에서 폭발해 경상, 전라, 함경도, 경기도 광주까지 이어져 총 37차에 걸쳐 거세게 일어 났다. 이 민란을 '임술민란' 이라 하며 세도가의 국정농단의 결과는 조선의 쇠락을  향한 지름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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