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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르신의 기회를 담은 국밥 한 그릇

시대일보 | 기사입력 2025/05/19 [14:11]

[기고] 어르신의 기회를 담은 국밥 한 그릇

시대일보 | 입력 : 2025/05/1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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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로 성북구청장    

“집에만 있으면 허리도 마음도 굽었는데, 이젠 다시 펴집니다!”

성북구 장위전통시장 앞 ‘할매정(情)국밥집’에서 일하는 황춘옥(73) 어르신의 밝은 목소리다.

 

‘할매정 국밥집’은 성북구와 성북시니어클럽이 서울시 공모사업으로 지역의 6~70대 어르신 여섯 분과 함께 전통시장 골목에 문을 연 식당이다. 15평 남짓한 공간엔 테이블 6개가 전부지만, 이곳은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어르신들이 ‘일터의 주인’으로 돌아온 공간이다.

 

식당 일은 바쁘지만 마음은 펴졌다는 황 어르신의 말씀대로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며 지역사회 속 ‘쓰임 있는 존재’임을 느끼는 기회다. 어르신에게 ‘일’은 곧 자존이다.

 

성북구의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19.9%다. 대한민국은 이미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정책이 어르신을 ‘돌봐야 할 수혜자’로 본다. 삶의 경험과 일할 의지가 충분한 이들을 단지 보호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반쪽짜리 복지에 불과하다.

 

“일만 있으면 나가서 하지.” “집에만 있으려니 하루가 너무 길어.” 현장에서 자주 듣는 이 말들이 행정을 움직이게 한다. 어르신 일자리는 단순한 일이 아닌, 단절된 일상과 관계를 잇는 사회적 연결망이자 삶의 활력을 되찾는 기회다. 그래야 복지가 아닌 진짜 ‘기회’가 된다.

 

이를 위해 중앙정부의 일자리 설계 권한을 지방정부로 이양할 필요가 있다. 지역의 여건과 주민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반영할 수 있는 곳이 지방정부다. 사업 유형과 조건을 유연하게 설계하고, 운영 주체도 직접 선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단순 인건비 지원을 넘어 교육, 공간, 홍보까지 포괄하는 통합 운영이 가능하도록 예산도 총액 지원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현재처럼 항목별로 제한된 구조로는 현장의 다양한 요구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참여 어르신 교육, 작업 공간 마련, 주민 홍보 등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 요소에 재정을 탄력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어르신 일자리는 중앙이 아닌 지역이 중심이 되어야 더 오래가고 더 깊이 닿는다. 지금이 그 전환의 시점이다.

 

‘할매정 국밥집’은 어르신을 돌봄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지역의 이웃으로 보는 작은 전환의 시작점이자, 지방정부가 주민 삶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는 행정 사례다.

 

예산보다 중요한 것은 의지이고, 매뉴얼 보다 필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이해다. 국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 노년의 봄날이 더 많은 마을로 퍼져가길 바라며, 성북구는 앞으로도 주민 삶의 온도를 따뜻하게 바꾸는 행정에 집중하겠다.

 

국밥집 벽엔 이런 안내문이 있다. “본 매장은 어르신들의 일자리 공간입니다. 서비스 과정에서 미숙한 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르신 일자리는 우리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그분들의 삶 안에 담긴 인내와 깊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음을 일깨운다. 국밥 한 그릇의 따뜻함은 허기보다 마음을 먼저 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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